검도 유망주가 아카데미 천재 검사가 되었다.
- 등록일2025.06.11
- 조회수240
#1화.
누구나 꿈을 꿀 수는 있지만,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세계 최고의 검도가가 되겠어요.
부모님의 영전에서 다짐한, 만 15세 강정민의 꿈 역시 이루어지지 않은 꿈이었다.
4년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모든 검도계 사람들이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22세 강정민은 대학도 나오지 못한 그저 그런 카페 알바생일 뿐이었지만.
* * *
귀가한 정민은 공연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피곤한 하루였다. 이런 날은 어김없이 악몽을 꾸기 마련이라 바로 잠들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재밌는 거 없나.’
우튜브 추천 영상을 뒤적거리던 정민의 왼손이 멈췄다.
영상 속에서는 호구를 착용한 두 사람이 죽도를 들고 겨루고 있었다.
업로드 일자는 하루 전.
'어제가 결승이었나.'
한동안 일부러 관심을 끊고 살았기에 전혀 몰랐다.
전날이 제24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 결승이었다는 것을.
평소 같았으면 눈에 띄자마자 관심 없는 영상으로 보냈겠지만, 영상 썸네일에 박힌 한 이름을 보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권창현.'
창현은 정민과 같은 도장 문하에, 두 살 어린 동생이었다.
- 형, 난 언제쯤 형처럼 될 수 있을까요?
언제나 정민을 따르며 우러러보던 창현은 대한민국 국가대표가 되어 세계대회 결승전 무대에 서 있었고,
한때 검도계의 촉망받던 유망주였던 정민은 알바를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듯 살고 있었다.
“후…….”
되도록 술에 의존하지 않으려 해 왔지만, 오늘 밤은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 같았다.
정민은 맥주를 사 오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 * *
검도의 종주국은 일본이다.
축구나 테니스처럼 종주국이란 이름이 무색한 경우도 있지만, 검도에서 종주국 일본은 언제나 굳건한 강함을 보였다.
세계검도선수권대회 출범 이후 한 번도 대한민국이 일본을 꺾지 못했을 정도로.
2006년 준결승전에서 일본을 탈락시킨 미국과 결승에서 맞붙어 우승을 거머쥔 전설의 역사가 있으나…….
이후 20년여간 대한민국 검도는 단 한 번도 세계검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지도, 일본을 쓰러뜨리지도 못했다.
- 지금 이곳은 대한민국 대 일본, 일본 대 대한민국의 경기입니다. 2대 1로 위기에 몰린 대한민국을 구원해 줄 마지막 선수는 바로…! 권창현 선수입니다!
왼손에 든 맥주캔을 간간이 홀짝이던 정민은 어느새 캔이 비어버린 것을 알았다.
하지만 새로 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만큼 손에 땀을 쥐는 경기였다.
정민은 자신도 모르게 맥주캔을 찌그러뜨리는 것도 모르고 응원했지만 그의 냉정한 눈은 이미 어느 쪽이 이겼는지 알고 있었다.
두 선수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고 심판이 선언한 결과는.
- 대한민국! 마지막 희망 권창현 선수가! 결국 일본의 사이토 선수에게 무릎을 꿇고 맙니다……!
- 아… 정말 아쉽습니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 정말 잘 싸워줬죠?
- 그렇습니다. 결과는 너무 아쉽지만 이렇게 결승전까지 온 것만으로도 정말 너무 대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대한민국 검도의 황금세대라는 이름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줬어요.
- 정말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말 안타까운 것이 이 자리에 만약 그 황금세대의 필두라 불렸던 강정민 선수가 있었더라면…….
캐스터는 실언했다는 듯 급히 입을 막았지만 편집 영상도 아닌 막 올라온 따끈따끈한 라이브 영상이라 해당 발언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민은 더 보지 않고 영상을 껐다.
세계검도선수권대회의 역사는 19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첫 대회부터 참가했고 우승도 준우승도 해 봤지만 50년 넘게 종주국 일본만은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한국.
그 오랜 숙원을 드디어 이룰 만한 인재로 국내 검도계 관계자들이 점쳤던 것이 바로 강정민이었다.
- 너는 우리나라 검도계에 희망의 별이구나.
17세로 처음 국가대표가 됐을 때, 정민이 다니던 검도관 관장의 말이었다.
그렇게 나간 세계대회에서 개인전 4강에서 일본 선수에게 석패, 단체전에서는 1승을 거뒀지만 팀은 패배라는 다소 아쉬운 성적을 뒤로하고.
그렇게 분루를 삼켰던 다음 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일취월장한 실력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 돌아가신 부모님과 약속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검도가가 되겠다고.
세계대회도 아닌 국가대표 선발전 우승이었지만 이 인터뷰 영상이 이슈가 되어 검도계뿐 아니라 세간의 기대를 모았지만,
찬란하게 빛날 일만 남았던 정민의 인생을 앗아간 건 한순간의 악몽이었다.
규정 속도를 한참 넘은 속도로 인도로 돌진한 졸음운전 차량이 훈련하러 가던 정민을 덮쳤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에게 닥친 건 오른팔 신경 손상이었다.
그래도 정민은 포기하지 않고 재활에 매진했다.
누구보다 정민을 아꼈던 도장의 사범님, 늘 응원하던 친구들과 선후배들의 기대를 배신할 수 없다는 마음도 물론 컸지만,
- 세계 최고의 검도가가 되겠어요.
무엇보다 부모님 영전에서 한 맹세가 있었기에 결코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2년 동안 모든 걸 걸고 노력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마비되었던 오른팔을 움직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오른손의 감각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왼손을 주 손으로 바꿔가며까지 노력했지만, 기본적으로 양손으로 잡아야 하는 검도의 특성상 오른손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정민의 선수 복귀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어느 순간 정민은 도장에서 아예 종적을 감추었고, 그를 지도했던 사범이나 관장, 동고동락했던 선후배들도 차마 붙잡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알고리즘이야.’
그렇게 아예 검도와는 연을 끊고 살려고 했는데.
아니, 사실은 아직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했다.
정민은 문득 진열장에 시선을 주었다. 그동안 받은 상패나 트로피가 고스란히 있었다.
몇 년이나 꺼내지 않아 먼지가 쌓여 있을 게 분명했다.
그동안 쌓인 먼지도 털어주고, 이제는 보내주자.
자신이 없어진 후에도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해서 그 자리까지 올라갔을 창현도 우승하지 못했다.
한 손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자신이 애초에 넘볼 수 없는 길인 거다.
정민은 무릎을 꿇고 기어가 트로피를 하나씩 만져보았다.
이건 초등학교 4학년 때 준우승, 이건 중학생 때 첫 우승…….
그렇게 감상에 젖어 있던 때,
불안정하게 놓여 있던 묵직한 트로피 하나가 하필이면 정민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쿵!
정신이 아득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 * *
“야, 말이 말 같지 않냐?”
어렴풋이 귀에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민은 뒤통수를 문지르며 일어났다.
‘멀쩡하네?’
분명 5kg이 넘는 트로피에 정통으로 맞았는데도 의외로 혹도 통증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의아해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더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야?’
분명 정신을 잃기 전에는 원룸이었는데 웬 낯선 골목길이었다.
‘꿈인가?’
심지어 한국 같지도 않았다. 드문드문 보이는 건물들이 고풍스러우면서도 이국적이었다.
볼이라도 세게 꼬집어 봐야 하나 생각하다가 자신을 깨웠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곁에 아무도 없는 걸 보니 정민을 부른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낯선 목소리에서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느낌이 들었던 탓에 신경이 쓰였다.
“왜 그러세요……. 저 진짜 돈 없단 말이에요.”
멀리서 봐도 성인 남성 세 명이서 소년 한 명에게 삥을 뜯으려는 흔한 상황.
개중 조금 마른 남자 하나가 땅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새끼야. 뒤져서 나오면 동전 한 개당 한 대다?”
“꼬마야, 우리도 폭력을 진~짜 싫어하는 사람들이거든? 응? 좋은 말 할 때 주머니 열어라.”
먼 거리에서도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정민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앞으로 달려나가려는 마음을 억눌렀다.
‘경찰 불러야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현대인의 필수품 스마트폰이 없다는 불안감도 잠시, 그보다 심각한 문제가 눈에 띄었다.
‘옷이 왜 이래?’
정민의 옷은 집에서 입고 있던 편한 옷도 아니었고 그가 평소 입던 옷도 아닌, 처음 보는 옷이었다.
진짜 꿈인가.
외국 영화에 나올 법한 옷이라는 생각을 하며 옷을 만져보는데 허리춤에서 뭔가 걸리적거렸다.
‘검?’
어떻게 봐도 검 한 자루였다. 그것도 환도도 아닌 롱 소드.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정민은 도무지 현실감이 없는 이 현실을 꿈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잠정 결론짓고 나니 할 일은 한 가지.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기도 전에 먼저 말이 나왔다.
“이봐요.”
누가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소년을 위협하는 데 열을 올리던 깡패들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가 다가오는 정민을 보고 안심했다.
“어이, 갈 길 가쇼.”
덩치 큰 놈이 눈을 부라리며 손짓했다.
“아니아니, 그냥 보내면 안 되지. 아가야, 너도 이리 와봐라.”
콧수염을 기른 사내의 말이었다.
오란다고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이 있을까.
물론 심심해서 부른 것은 아니었지만 싸울 준비도 하지 않고 가까이 갈 생각도 없었다.
정민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허리춤에서 검을 풀어 뽑지는 않은 채 손에 쥐었다.
‘느낌이 좋아.’
시험 삼아 몇 번 휘둘러 보았지만 오른손의 움직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웠다.
그 모습을 보고 수군대는 깡패들.
“저 새끼 칼이 있는데요?”
“믿는 구석이 있기는 했구만.”
3대 1이었지만 검을 들자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각자 몽둥이를 들고 일어서 경계하는 깡패들.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네.’
셋이서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는 곳에 혼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뭔가 상대를 도발할 만한 게 없나.
그때 손에 낀 장갑이 눈에 들어왔다. 옛날엔 장갑을 벗어 상대에게 던지는 게 결투 신청의 의미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한 번 해볼까?’
정민은 장갑을 벗어 깡패들 쪽으로 던졌다. 두꺼운 장갑은 생각보다 멀리 날아가 말라깽이의 발치에 떨어졌다.
예상과 달리 깡패들은 어이없어했다.
“뭐냐, 이건?”
“장갑인데요? 으잉? 이 문장은?”
“뭔데요, 형님? 비싼 검까?”
장갑을 유심히 살피던 말라깽이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씨익 웃었다.
“저 자식, 귀족입니다. 아마 알페온 백작가 둘째 아들.”
‘그래?’
정민 본인도 몰랐던 사실이었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맏형처럼 보이는 콧수염은 당황했다.
“야야, 그럼 우리 토껴야 하는 거 아니냐? 알페온이라면 검술 명가 아니냐.”
말라깽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민을 가리켰다.
“맞습니다. 헌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저놈은,”
저놈은? 정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검을 지지리도 못 쓰기로 소문났거든요!”
뭐라고?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맞다. 나도 들었다. 알페온 백작가 둘째 아들은 검술 머저리라지?”
“글면 뭐, 형님들까지 나설 게 있겠슴까. 애새끼가 토끼기 전에 후딱 가서 잡아오겠슴다.”
혼자서 달려오는 덩치를 본 정민은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계획대로야.’
정민은 검을 뽑지 않은 채 침착하게 자세를 취했다.
처음 보는 자세에 당황한 덩치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콧수염이 중얼거렸다.
“저게 뭔 자세냐?”
중단.
정안세라고도 하는, 검도의 5가지 겨눔세 중에서도 가장 기본자세.
도장에서 정신 수양이라며 단체로 중단 자세를 장시간 취하게 하면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민은 희한하게도 이 자세를 취할 때마다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세계검도선수권대회에서 일본 선수에게 졌을 때도 실컷 울고 나서 도장에 돌아와 몇 시간이고 같은 자세를 취했던 경험이 있었다.
‘이러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져.’
지금도 그랬다.
낯선 곳에 떨어진 이질감,
대련이나 시합이 아닌 실제 싸움을 앞둔 긴장감,
오랜만에 검을 잡은 불안감 등.
모든 잡념이 검 끝이라는 한 점에 모였다가,
사라졌다.
검에 완전히 집중한 정민과 덩치의 눈이 마주쳤다.
평온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를 마주한 덩치는 큰 몸에 어울리지 않게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날 뻔했지만,
뒤에서 말라깽이가 외쳤다.
“괜히 폼 잡는 거야! 신경 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덩치가 달려들어 몽둥이를 휘둘렀다.
“뒤져, 이 새끼야!”
정민의 눈이 번쩍 빛났고,
다가오는 몽둥이보다 한 박자 빠르게 정민의 신형이 움직였다.
얼마나 오래 품고 있었을까.
스스로도 마음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놓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욕망이 소리로, 외침으로 터져나왔다.
“머리!!!”
어느새 덩치를 스쳐 지나간 정민은 남은 두 상대를 바라보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천천히 허물어져 가는 덩치 뒤로 눈을 커다랗게 뜨고 경악한 말라깽이와 콧수염의 모습이 보였다.
정민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건 정당방위야.”